DATE : 2021-05-12 03:31:10 / HIT : 194 
제 목 강산이 두번 변하는 동안

2020년 개원 20주년을 맞아 이비인후과 학회 회보에 기고한 글이 이번에 게재됐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을 보낸 소회를 정리해 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싶습니다.
다시 한번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https://www.korl.or.kr/webzine/105/sub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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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비전이비인후과의원 원장 / 문인희        

이 동네에 이비인후과를 개원한 지 스무 해가 되었다.
선배들 말씀이 개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리라고, 어떤 분은 입지라고, 다른 분은 위치라고 했다. 큼지막한 지도책을 사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운명처럼 눈에 번쩍 띄는 곳이 있어 자리를 정했다.

영구 임대 아파트 바로 앞이라서 그런지 장애인, 생활 보호 대상자가 많은 편이다.
뇌성마비가 있어 휠체어를 타고 온 송 양은 청진을 하는 도중에도 연신 기침을 해 댄다. 며칠 째 기침이 심해서 흡입제와 온갖 기침약을 최대로 처방했는데도 잘 낫지 않아 보호자를 들어오시라고 했다. 저만치 걸어오는데 벌써 옷에 찌든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머니, 아직도 집 안에서 담배 피우세요? 따님은 숨 쉬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보통 천식보다 더 조심해야 돼요. 절대 집 안에서 담배 피우시면 안 돼요.”

뇌성마비에 천식까지 있는 딸과 같은 방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늙은 엄마에게 화가 났다.

흐이유~

검게 탄 피부에 깊게 팬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노인은, 대답 대신 금세 눈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은 왕방울 만한 눈동자를 굴려 천장 구석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얘를 보고 있으면 담배를 안 피울 수가 없어요.”

인생의 고단함을 축적한 그 한마디에 차마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재차 말할 수가 없었다. 뇌성마비만 아니었다면 늘씬한 키, 엄마를 닮아 큼직한 눈망울에 또렷한 쌍꺼풀을 가진 미인이었을 딸을 보고 있자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엄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내 가슴이 같이 먹먹해 졌다.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지만 환자는 무슨 잘못인가?

“그러면 집 안에서라도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문 여는 소리와 동시에 박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나 왔어! 내가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도 않고 또 왔어!”

난청이 심해서 자기가 잘 안 들리니 다른 사람도 귀가 어두운가 싶은지 엄청 크게 소리를 지르신다. 팔십 대 후반인 박 할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허리가 거의 직각으로 굽은 채 바퀴 달린 보조기를 밀며 아주 천천히 걷는다. 얼마나 천천히 걷는가 하면 할머니가 대기실에서 진료실에 오는 사이에 환자를 두 명은 더 볼 수 있을 정도다. 속눈썹이 안으로 자라서 눈을 찔러 두 차례 안과에서 수술을 받으신 후에 매우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몇 개가 눈을 찌른다고 한 달에 한 번씩 눈썹을 뽑아 달라며 오신다. 할머니는 바로 병원 길 건너편에 살지만 걸어오는데 삼십 분은 족히 걸릴 듯 싶다. 가까운 안과를 찾아 가려면 보조기를 들고 버스를 타기도 어렵고 저런 속도의 걸음으로는 몇 시간은 걸어야 할 테니 그냥 집 가까운 이 곳에 오는 것이다. 그렇게 길 건너 오십 미터의 대장정을 마친 박 할머니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를 지른다.

“땡겨! 앞에서 땡겨줘야제~”

보조기를 당겨주면 그나마 조금 더 빨리 진료실로 들어올 수 있다. 잘 못 듣고 잘 안 보이니 더 외롭다는 표현을 큰 소리로 알리는 것일까? 찌르는 눈썹을 말끔히 빼고 나면 할머니는 내 귀에 대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고함 인사를 한다. 그렇게 박 할머니를 진료하고 나면 소음성 난청이 온 듯 한동안 귀가 먹먹하다.

아기들은 진료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발버둥치고 운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낯선 사나이가 불을 비추면서 다가간다.

‘엄마, 흰 옷을 입은 아쩌찌는 누구야? 머리에 빛나는 동그라미가 눈 부시고 무서워. 아쩌찌가 콧구멍에 이상한 걸 뿌려. 엄마도 저 아쩌찌 편이야? 왜 내 팔다리를 붙들고 있어? 쇠 막대기를 목에 넣으니 우엑 구역질이 난다고. 으앙 사람 살려.’

이렇게 큰 소리로 우는 아기를 진료하고 나면 또 한동안 귀가 먹먹하다.

그런데 아기들조차도 너무나 차분하게 잘 진료 받는 곳이 있다. 수녀님 한 명당 열 명의 고아를 맡아 키우던 꿈나무 마을. 지금은 고아원 규모도 많이 줄어들었고 이름도 바뀌었지만, 한때 수백 명의 고아가 그곳에 살았다. 딸내미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고아원 아기들을 돌보면서 어려운 사람들까지 헤아리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에 이비인후과 의사회에서 진료봉사 갈 때 내 순번 때마다 데려갔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꿈나무 마을 아이들은 두 돌만 지나도 칭얼대거나 울지도 않고 아무 도움 없이 이비인후과 진료를 곧잘 받았다. 그곳 아이들은 수녀님들이 아무리 정성을 다하더라도 열 명이나 되는 속에 부대껴 살다보니 세상사는 이치를 일찍 깨닫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공부손 열 개가 일손 한 개 못 당하고, 일손 백 개가 공부손 한 개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수녀님이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키워도 급성 중이염으로 아기가 귀 아픈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의사의 진찰보다 더 큰 수녀님의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아기는 성장한다. 서로가 맡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가운데 골고루 사랑받은 어른이 된다. 어쩌면 그것은 봉사라기 보다 내가 인생을 배우는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개원 스무 해 동안, 우측 귀에 생긴 진주종이 두개골을 뚫고 안진이 용수철처럼 튀는데도 입원할 상황이 안 된다고 약만 달라던 폐기물 처리업체 기사님을 삼십 분간 설득해서 응급 수술 받게 해서 완쾌된 일, 아이 엄마가 알레르기 피부 반응 검사 받는 동안 화장실 급하다고 칭얼대는 아이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했더니 검사실 바닥에 똥 싼 일, 심폐소생술을 했던 경우도 두 번 있었는데 다행히 모두 무사히 잘 회복된 일 등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최고의 참모이자 지지자인 아내와 딸, 너무나 운 좋게 만난 착실한 직원들, 소소한 고장들 잘 해결해 주시는 의료기 사장님과 우리 상가의 맥가이버 관리소장님, 그동안 나를 믿고 찾아와서 진료 받은 환자분들 덕분에 지금까지 무사히 개원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모두들 너무나 감사하다.

전문의가 되면 통달한 경지가 되어 환자를 보기만 해도 척척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어려운 환자는 많고 배워야 할 새로운 치료법들은 계속 나온다. 대학병원에 있으면 강제로라도 공부하게 되지만, 개원의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최신 지견에서 점차 멀어지기 쉽다. 컴퓨터 프로그램도 그냥 두면 구닥다리가 돼서 계속 업데이트를 시켜야 하거늘, 굳이 은나라 탕왕이 세숫대야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고 새긴 고사를 떠올리지 않아도 될 일이다.

개원 초부터 세브란스병원에서 운영하는 개원의 집담회에 참석하다보니, 최고의 연자들이 수년간 연구한 다양한 최신 지견으로 업데이트가 된다. 강의 후에는 연자와 참석자들이 교수 회의실에 가서 아침 다과를 들면서 못 다한 질문도 하고 진료 경험담을 나누는데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혼자만 좋은 강의 듣기가 너무 아까워서 여건상 못 오는 원장님들을 위해 몇 달치 강의를 요약해서 전해주다 보니, 스스로 최신 지견을 공부해 보자는 취지에 동의하는 원장님들이 여남은 명 모이게 되어, 각자 정리한 내용을 번갈아 발표하고 자신의 진료 경험을 나누는 공부 모임으로 발전해서 십 년도 넘게 계속하게 되었다. 공부 모임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진료를 우리 지역 주민들에게’ 하자는 포부를 담아 ‘이가수’로 정했다.

이 세상 최고 수준이라고 하면, 최배달 혹은 바람의 파이터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무술가 최영의 사범이 떠오르는데, 평생 동안 각 무술의 최고수들을 찾아가 대결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국의 이비인후과 최고수 원장님들이 평생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터득한, 논문이나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진료 경험을 전국의 원장님들이 공유한다면, 각지의 환자들은 얼마나 더 좋은 진료를 받을 수 있을까? 이비인후과 의사회보 ‘헤드미러’에, 개원의 중에 실력자들을 초청해서 진료 노하우를 청해 듣는 ‘선배님께 길을 묻다’ 좌담회 코너를 만들었다. 십 년이 넘게 계속 훌륭한 선배님들을 만나다 보니 배우는 것도 많지만, 원고를 정리하면서 최배달의 정신과 탕왕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된다.

스무 해 전에는 IMF로 나라가 위태롭더니 작년부터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휘청거린다. 요즘은 코로나19 환자 진찰했다고 의사가 격리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코로나19 유행 초기에는 열나는 환자 목을 봤다가 나중에 환자가 신종 코로나로 확진되면 의사는 마스크를 하고 진찰했더라도 이 주일 동안 격리되어야 하는 지침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목이 아프다고 온 환자의 목 진찰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비인후과 의사로서 무척 난감했던 적이 있다. 몇 년 전 메르스가 유행했을 때 환자를 진료한 의사의 자녀 신상이 학교에 소문이 나서, 그 의사의 자녀는 기피대상이 되었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제대로 진찰하려고 환자 목을 볼 때마다 이 주일 간 격리되는 것 뿐만 아니라 온 가족과 직원들까지 입을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인가?

이비인후과 의사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누군가 익명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코로나19 환자일지 모르는데 혹시 격리되더라도 목 아프고 열나는 환자의 마스크를 내리고 목을 진찰하겠는가?’ 90% 이상의 이비인후과 의사가 ‘우리의 본분이다. 나중에 격리되더라도 진료는 제대로 하겠다.’고 답했다. 러시안 룰렛 같은 상황을 진료 일선에서 맨 몸으로 맞서고 있는 동료들의 사명감이 눈물겹다. 코로나19로 많은 개원의 집담회와 이가수가 중단되었다. 온라인 강좌를 여기저기 등록해 들어 보지만, 오프라인 모임에서 느끼는 인간미가 없어 못내 아쉽다. 얼른 코로나 국면이 해결되어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진료 받고 의자에서 내려오며 아이가 말했다.

“우린 어제도 ‘비전이비인후과 놀이’ 했는데…….”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그렇게 동네의 일부가 되었다.

여건이 허락하는 날까지, 평생을 두고 알게 된 의술에 더해서 동료들과 함께 최신 지견을 공부하며 동네 주민, 내원 환자들과 함께 살아가려 하는 소박한 소망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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