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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017-12-12 04:03:08 / HIT : 174 
제 목 할머니의 새벽 - 보령의사 문학상 금상 (문인희 원장)

보령의사수필문학상

할머니의 새벽
        
연도 : 2009년
수상 : 금상
이름 : 문인희
소속 : 비전 이비인후과

  아침에는 밤사이 아파서 괴로웠던 분들이 먼저 병원 문 열기를 기다린다. 밤새 기침하는 아기를 업고 온 엄마, 열나고 목 아픈 학생, 코피가 멈추지 않는 중년 아저씨…….

  오늘도 역시 ‘오 할머니’가 와 계신다. 오 할머니는 바쁘고 급한 환자들 사이에서, 아침 마다 병원 문을 열기 전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청소도 시작하지 않은 대기실에 앉으신다. 오 할머니처럼 거의 매일은 아니지만, 김 할머니와 백 할아버지도 직장인과 학생들보다 더 부지런히 오시는 아침 단골이시다. 그 분들의 증상을 들어보면 귀나 코가 가렵거나, 혀가 화끈거려 음식 드시기가 불편하시거나, 젊어서 코를 다친 후로 방치해서 코딱지가 자주 생겨 숨쉬기가 불편한데 연로해서 수술 받으실 형편은 안 되는 경우로서, 딱히 응급은 아니고 만성적인 증상들이다.

  급하지 않은 증상은 조금 늦게 오셔도 될 텐데, 하필 바쁘게 진료 받고 등교하거나 출근해야할 학생이나 직장인들 보다 일찍 오시는 게 매번 마음에 걸렸다. 혹시 마음 상하실까 염려되어 미루고 미루다가 “할머니, 아침에 너무 일찍 오시는 것 보다, 열시나 열한시쯤 조금 늦게 오시면, 바쁘지 않게 더 정성 드려 치료해 드릴 수 있을 텐데요.” 했더니, 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원장님, 밤새 코가 가렵고 귀가 가려워도 여기 와서 약 한번 바르고 가야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여기 들르는 게 내 하루의 시작 이예요.”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할무이’랑 같은 방을 썼다. ‘할무이’는 일찍 할아버지를 여의고 수절하시면서 젊은 시절을 다 보내셨고, 환갑이 넘으신 이후로는 나와 함께 거의 이십년을 같은 방에서 생활하셨으니 할머니와 손자 관계 이상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구슬치기가 잘 안되었던 예닐곱 살 무렵 어느 저녁, “할무이, 요새 애들은 ‘X빨’이 세서 잘 못따겠어예.” 하고 투정했더니, 내 등을 쓰다듬고 웃으시면서, “우리 인희는 ‘글빨’이 있어야제.” 하셨다.
  ‘X빨’이란, 구슬치기할 때 한쪽다리를 길게 앞으로 뻗어 상대방 구슬 가까이 대고 구슬을 맞히는 반칙을 뜻하는 속어였는데, 당시에 나는 할무이의 말씀을, 그냥 ‘X빨’의 반대말이 ‘글빨’인가보다, 그러면 상대방이 비겁하게 해도 나는 ‘페어플레이’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나중에야 ‘글빨’이란 ‘글월’을 뜻하는 사투리로, 자신이 쓰는 말이 어떤 욕인지도 모르고 구슬 따기에만 여념 없던 철없던 어린 손자에게,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뜻 깊은 의미의 암시와 축원을 담아하신 말씀이었음을 깨달았다.

  여남은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친구들이 헝겊조각을 길게 잘라 만든 팽이채를 쓰던 때, 실타래를 새끼 꼬듯이 엮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할무이표 팽이채’를 만들어 주시기도 했고, 중학생 이후로 내가 공부할 일이 많아지자 새벽에 일찍 깨워주시는 ‘모닝콜’을 대신 해 주셨다.

  내가 새벽공부를 하고 있으면, 할무이는 방 한쪽 구석에 앉아 -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주 나지막한 음성으로 - 온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기도를 하시고, 암기하고 계시던 각종 불경과 구전되어 내려오는 민요, 백발가 등을 시리즈로 암송하신 후에, 화투 패를 꺼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오늘의 운수를 점쳐 보신 다음, 거울을 앞에 놓고는 단정히 머리를 빗고 비녀를 꽂으셨다. 할무이의 새벽 염불과 화투 패, 머리 빗기 코스는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그 때 쯤이면, 내가 새벽공부를 마치고 등교준비를 해야 할 시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아침코스’의 맨 마지막으로, 할무이가 머리 빗고나서 옷의 등 쪽에 붙은 흰 머리카락들을 떼 드리는 것이 내 몫이었다. 기억하기로 할무이의 아침코스는 내가 중학생 때부터 대학 졸업할 무렵까지 거의 계속 되었다.

  중학생 때, 한번은 매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시는 게 지겹지 않으신지 여쭈어 본 적이 있었는데, 할무이 대답은 ‘그냥’ 하시는 거란다. 덕분에 나도 일찍 화투놀이랑 화투 패를 배워서 해보다가, 결과가 좋게 나오면 신이 났고, 화투 패가 별로 신통찮으면 덩달아 기분이 시무룩했었는데, 할무이는 전혀 그렇지 않으셨다. 화투 패가 잘 되면 담담하게 기분 좋으셨고, 화투 패가 안 맞아 떨어지면 “체, 지까짓게 뭔데.” 하며 화투를 휙 던져놓고 아주 담담하게 다음 코스를 진행하셨다. 어쩌면 사소할지 모르는, 할무이의 생활방식 중에 아주 인상적이었던 그런 태도는 내게 깊이 각인되어, 의과대학시절 스무 개나 되는 과목을 거의 매일 하나씩 시험 치던 시기에 빛을 발하였으니, 시험을 잘 치면 담담하게 만족하며 다음 과목 시험 준비를 했고, 혹시 중간에 시험을 잘못 친 과목이 생기더라도 이내 마음의 균형을 잡고 다음날 시험공부에 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할무이는 현대식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매우 지혜로우셨고, 어릴 적 언니들에게서 배운 한글로 눈이 밝을 때는 동서양의 각종 고전과 명작들을 다 읽으셨는데, 하도 여러 번 읽어서 그 많은 명작을 다 외우실 정도였다. 차츰 눈이 어두워지니 책을 읽지 못하게 되어 라디오에 의존하여 시간을 보내게 되셨는데, 한동안은 각국의 뉴스와 일기예보, 법창야화, 라디오 드라마를 꿰고 계시기도 했다. 더욱 연로해져서 귀마저 어두워지게 되자 그동안 외우신 불경과 각종 민요 등을 시리즈로 엮어 할무이 고유의 ‘아침코스’를 완성하시게 된 것이다. ‘아침코스’를 하신 후에 할무이가 가장 궁금해 하셨던 것은 신문의 일기예보에 실리는 일출과 일몰 시각이었는데, 내가 하교하여 석간신문을 보고 있으면 “내일 해 뜸, 해 짐이 몇 시고?” 하고 물어보셨다. 당시에는 ‘도대체 해가 몇 시에 뜨고 몇 시에 지는 게 왜 궁금하실까? 어차피 해는 매일 뜨고 지는데…….’ 싶었고 보통 음성으로 대답해서는 잘 못 들으시니 할무이 귀에 대고 소리 지르듯이 알려드리는 게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할무이는 해가 점점 빨리 뜨고 늦게 지는 것을 아는 것으로, 단조로운 일상에서 매일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어쩌면 우리 병원이 ‘오 할머니’ 나름의 아침 코스가 아닐까 싶어졌다. 나이가 들어 불러줄 곳도 없고, 별달리 할 일도 없는데, 왜 이리 밤은 긴가 싶어지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 없는 늙은 새벽을 일찍 열고 일어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딘가 갈 곳을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닐까? 그 분들에게는 출근시간보다 더 기다려지는 시간이기에, 춥거나 덥거나 이른 아침에 병원 문 앞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귀 아프고 열나는 아기와 귓구멍에 벌레가 들어간 아주머니 틈에 곱게 단장하고 앉아 계신 오 할머니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할머니, 오늘은 어디 좋은데 가세요?”
“네, 그냥 한번 눈썹만 그려봤어요. 오다가 맛있어 보여서 조금 샀는데, 시간날 때 드세요.”하고 귤 한 봉지를 주신다.
“할머니 드시지. 고맙게 잘 먹겠습니다.”

새로운 해가 뜨고, 비슷하지만 또 조금 다른 오늘이 그렇게 시작된다.


http://www.boryung.co.kr/contribution/essay_view.do?SEQ=34&list_url=L2NvbnRyaWJ1dGlvbi9lc3NheS5kbz95ZWFyPTIwM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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